#제프리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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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Tiger
인도판 기생충같은 느낌. 단, 차이가 있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부자들에게 이용당하고 희생당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닭장을 부수고, 화이트 타이거가 그렇게도 바라고 꿈꿔왔던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한 그의 모습이 왠지 그가 경멸했던 그들의 모습과 비슷해보였던 건 왜인지.
우리 안에 한번 박힌 하인의 마인드셋, 노예근성은 쉽게 바뀌지 않기에 그 역시 껍질을 부수고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닭의 가족에서 백호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닭으로 태어난 것보다 더욱 가혹한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주인공 발람만큼이나 마음에 남았던 캐릭터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주의 막내아들 아쇽.
뼛속까지 착취적이고 하인에게 인간적 대우따위는 하지 않았던 다른 주인들과는 달리 외국물을 먹고 온 그와 그의 부인은 그를 존중하는 듯했고, 인간적이고 상식적으로 대하고자 했다. 최소한 어느 시기까지는 진심으로 그랬다. 발람에게 IT기술과 아웃소싱과 같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가족들이 발람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을 때, 아쇽은 묵인하고 방관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비겁함을 택했다. 결국 그는 온실 속 화초로 곱게 자란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쇽을 보며 몇년 내내 이해되지 않았던 한 인물이 겹쳐보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공부도 할만큼 했고, 지성과 인품, 실력도 있어보였던 그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왜 자신의 양심과 지성, 그간의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아버지의 왕국을 물려받기로 선택한 것일까.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자수성가해 성공했다던, 스스로를 머슴이라 부르기 마지 않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멀리 미국까지 보내 공부시키고 온갖 세련된 교양과 매너, 교육을 다 받게 한 아들. 못배운 아버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닳고 닳아 세상 물정에 빠삭해진 아버지보다 배울만큼 배우고, 알 것 다 알아 학자적 양심도 갖추고, 선악과 사리를 다 분별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실제로 그런지와는 별개로) 아들이 더 나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결정적 순간에 그는 뒤로 물러났고, 비겁함과 안정을 맞바꾸었다. 아쇽이 그러했듯, 그는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어서 응당 내야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존재감이 너무나 미미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막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열었던 컨퍼런스가 항상 기억에 남았다. <빈곤의 종말(The end of poverty)>의 저자인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와 진행한 좌담회였다. 능숙한 영어실력을 뽐내며 직접 인터뷰를 하고, 좌중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하기도 했다. 참으로 그다운, 기품있고도 세련미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아버지의 대를 이어 새로운 왕국의 주인(실소유주는 아닌, 허수아비일지는 몰라도)이 되는 과정을 보며, 그때의 그 컨퍼런스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영화 속 아쇽의 정체성이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자신을 어떻게 인도인으로 규정지어가고, 그 문화와 권위, 권력을 이용하는 법을 체득해 가는지 지켜보며, 그가 겪었을 일련의 변화 과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원래 뼛속부터 악독했던 지주들보다, 아쇽이 어쩌면 더 잔인한 지주였을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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